나는 여태 이렇게 비어 있고
너는 여태 그렇게 비어 있어
그러한 대수롭지 않은 운명으로 만나
대단치 않은 것처럼 곁을 훔치다가

모든 것이 채워지는 인생은 시시하다고 중얼거리며
밀쳐내는 이유를 만들기도 하다가
붙잡을 것 없는 텅 빈 밤이면
너의 텅 빈 마음을 파고드는 꿈을 꾸기도 하다가

아직 이렇게 비어 있는 나는
아직 그렇게 비어 있는 너 때문인지도 모르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한다
조금 더 비워두기로 한다


Posted by 으니가저아
:

0912 006. 꽃 - 안도현

시필사 2020. 9. 16. 21:44 |

누가 나에게 꽃이 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선뜻 봉숭아꽃 되겠다 말하겠다

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 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 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어야 해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꾸 하라 해주는 거야

그 어느 아침에 누군가
아, 봉숭아꽃 피었네 하고 기뻐하면
그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내 몸뚱어리 짓이겨 불러줄 것이다


Posted by 으니가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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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Posted by 으니가저아
: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Posted by 으니가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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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말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 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600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 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으나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 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Posted by 으니가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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